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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GONGJU CITY

2023.04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가휴 조익

  • 4월의 역사인물 가휴 조익(趙翊, 1556~1613)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중(棐仲), 호는 가휴(可畦)입니다. 1589년(선조 22) 일어난 기축옥사에 관한 직언을 올렸다 선조의 화를 불러 1602년(선조 35) 유배를 오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 1556년(명종 11)에 태어난 선생은 매우 영민하여 3세부터 문자를 해독했으며 16세에는 조부의 명으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이 되었습니다. 1582년(선조 15)에는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1588년(선조 21)에는 임금이 직접 주재하는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였습니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김홍민(金弘敏)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참모를 맡아 충보군(忠報軍)을 조직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하고, 관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조정에 나아가 1599년(선조 32) 예조정랑·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정철에게 벌을 주려는 왕에게 직언하여 왕이 대노하였고, 그로 인해 공주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 1607년(선조 40)까지 약 5년간 계속된 유배기간 동안 선생은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임금의 안위를 염려하며 항상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선생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公山日記)」는 17세기 초 공주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 유배가 끝난 후 선생은 조정에서의 관작이 회복되어 1610년(광해군 2)에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그만두고 귀향하였고, 1613년(광해군 5) 5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 200년 뒤인 1856년(철종 7)에는 유림들의 뜻으로 상주의 속수서원(涑修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 공주시는 「공산일기」를 통해 공주의 모습을 기록하고 항상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조익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3년 4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3 4월 가휴 조익1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4월 가휴 조익2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4월 가휴 조익3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4월 가휴 조익4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4월 가휴 조익5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4월 가휴 조익6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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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2023 4월의 공주 역사인물 포스터 이미지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2023 4월의 공주 역사인물 공주시 로고
  • 공산일기로 공주의 모습을 남기다 가휴 조익
  •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 자는 비중호는 가휴이며 공주에서의 유배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를 남겼다
  •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였스며, 한강 정구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고 1582년 생원시 자우언 1588년에는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보은 속리산에서 충보군을 조직하여 왜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관군에게 군량을 조단하기 위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공을 세웠다
  • 1602년 기촉옥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직언을 올린 일로 공주에 유배를 오게되었고 5년간의 유배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는 17세기 초 공주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 1607년 유배가 끝난 후 관작이 회복되었고, 1613년 5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후일 유림들의 뜻으로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