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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GONGJU CITY

2023.06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한태동

  • 6월의 역사인물 한태동(韓泰東)은 조선 후기에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노첨(魯瞻), 호는 시와(是窩)입니다. 한태동의 장인인 정영한(鄭榮漢)이 공산현감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한태동이 처가를 통해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한태동이 사은사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와 장령과 집의를 거쳐 홍문관 교리로 있던 1682년(숙종 8), 김익훈(金益勳)과 김석주(金錫胄) 등의 서인들은 남인들이 복평군(福平君)을 왕으로 추대할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였는데, 심문 결과 많은 부분이 무고로 밝혀졌습니다. 남인의 발본색원을 위하여 서인들이 남인역모설을 조작한 것입니다. 한태동은 같은 서인으로서 조지겸(趙持謙) 등 소장파와 함께 김익훈·김석주 등의 흉계를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하였다가 이듬해 파직되었습니다.
  • 이를 계기로 서인은 김익훈 등을 옹호하는 노장파 중심의 노론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는 소장파 중심의 소론으로 나뉘었습니다. 한태동은 1684년(숙종 10)에 사헌부 집의(執義)로 복직되었는데, 김익훈의 일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습니다.
  • 이러한 한태동의 정직하고 준엄한 성품으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한태동은 본래 고집하여 지론(持論)이 매우 준절(峻切)하여서 견벌(譴罰)을 입음이 정도에 지나쳤다”며 등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 한태동은 1687년(숙종 13) 10월, 경기도 광주 광릉에서 4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간하여 권세가의 미움을 받아 크게 출세하지 못했고, 가난을 개의치 않는 청백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 한태동의 저서로는 『시와유고(是窩遺稿)』가 있으며, 묘소가 공주시 웅진동 일원에 있습니다. 『공산지(公山誌)』에는 공주시 남부면 혈봉 아래에 묘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관련 유물로는 한태동의 간찰과 생원급제 교지, 조봉대부 공청도 도사 교지가 전해집니다.
  • 공주시는 청렴하고 정직했던 조선후기 문신 한태동의 삶을 기리고자 2023년 6월의 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3 6월 한태동1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6월 한태동2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6월 한태동3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6월 한태동4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6월 한태동5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3 6월 한태동6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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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공주시, 6월의 역사 인물 ‘한태동’ 선정
  • - 조선 후기 서인의 노소분당을 이끈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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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시, 5월의 역사 인물 ‘한태동’ 선정
  • - 조선 후기 서인의 노소분당을 이끈 정치가, 한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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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월의 공주 역사인물 포스터 이미지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2023 6월의 공주 역사인물 공주시 로고
  • 조선후기 서인의 노소분당을 이끈 정치가,
  • 한태동은 조선 후기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노첨魯瞻, 호는 시와是窩이다. 장인인 정영한鄭英漢이 공산현감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혼인으로 공주와 인인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 1682년숙종8 서인의 과격파 김익훈金翌勳과 김석주金錫宙등이 남인의 발본색원을 위하여 남인역모설을 조작하자, 같은 서인으로서 그들의 흉계를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하였다가 파직되었다.
  • 이를 계기로 서인은 김익훈 등을 옹호하는 노장파 중심의 노론과 그의 처벌을 주장하는 소장파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한태동은 1684년숙종10 복직되었는데, 그 일을 비난하는 상소를 다시 올려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 1687년숙종13 4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실록에 따르면 그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여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고, 가난을 개의치않는 청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 저서로는 시와유고是窩類稿가 있으며, 묘소가 공주시 웅진동 산 33-3에 남아있다. 관련 유물로는 간찰과 생원급제 교지, 조봉대부 공청도 도사 교지가 전한다.